music2007/03/02 12:03
●로스트로포비치

   생년월일 / 1927년 3월 27일
   출생지 / 아제르바이젠 바쿠
   출신학교/ 모스크바 음악원
   스승 / 코졸루포프
   콩쿠르 경력 / 1949년 부다페스트 국제 청소년 콩쿠르 1위, 1950년
  ‘프라하의 봄’ 국제 콩쿠르 1위
   데뷔연도 / 1947년 모스크바
   주요 레코드 /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베토벤 첼로 소나타
   전곡·브람스 첼로 소나타 전 2곡


    ●슈타커

   생년월일 / 1924년 7월 5일
   출생지 / 헝가리 부다페스트
   출신학교 / 부다페스트 음악원
   스승 / 아돌프 쉬퍼
   콩쿠르 경력/ 없음
   데뷔연도/ 1936년 헝가리 부크레슈티
   주요 레코드 / 베토벤 소나타 전집, 코다이·카사도의 무반주 곡집,
   드보르자크·하이든·슈만 첼로 협주곡


    ●샤프란

   생년월일 / 1923년 1월 13일
   출생지 / 레닌그라드
   출신학교 / 레닌그라드 음악원
   스승/ 알렉산더 스트라이머
   콩쿠르 경력 / 1937년 전 소련 바이올린 첼로 경연대회 1위, 1949년
   부다페스트 국제 청소년 콩쿠르 1위, 1950년 ‘프라하의 봄’ 국제 콩쿠르 1위
   데뷔 연도/ 1933년 레닌그라드 그랜드 홀
   주요 레코드 / 슈만·브람스·쇼스타코비치 첼로 소나타, 하이든에서 드뷔시까지의 ‘라이브 콘서트 첼로 소품집’


   20세기를 마감하는 이 시점에서 그동안 첼로의 아성을 쌓았던 수많은 연주가들 중에서 명성을 떨치다가 사라진 대가들을 꼽아보니 제1세대라 불릴 수 있는 카잘스 - 마르샬 - 카사도, 제2세대의 피아티고르스키 - 포이어만 - 푸르니에, 제3세대라 할 수 있는 나바라 - 토르틀리에 - 장드롱 -야니그로 - 로스, 그리고 전설 같은 뒤프레 등이 있다. 그러면 이들에 이어 혹은 이들과 함께 활약했던 생존하는 명연주자로는 누가 있을까? 얼른 떠오르는 인물로 로스트로포비치와 슈타커, 그리고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한 맥을 이루는 샤프란이 있다.

   로스트로포비치의 연주는 활화산 같은 힘에 넘친다. 연주에 몰입했을 때 그는 마치 육체의 한계를 모르는 거인처럼 거침없고 완전히 자유로워진다. 반면 슈타커는 냉철하고 지적이다. 그는 무대 위에서도 필요 이상의 몸짓이 없고 오직 음악을 위한 종사자이고자 한다. 샤프란의 음악은 낭만적이고 아름답다. 친지들은 그의 얼굴에서 인간적인 따뜻함, 그리고 시적인 성품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고 묘사한다. 이들을 모두 슬라브계이지만 그들의 음악만큼이나 상이한 음악 인생과 철학을 이루었다.

   러시아계 3인방, 음악만큼이나 상이한 수업시대와 예술 철학 연령으로 따지자면 1923년 1월 13일생인 다니엘 샤프란이 앞서고 있다. 그는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의 첼로 수석으로 30년간 활동한 보리스 샤프란의 아들로 어머니 역시 피아니스트였다. 샤프란은 만 여덟 살이 되던 해 부친의 뜻에 따라 첼로를 시작했다. 그의 아버지는 ‘음악은 무엇보다도 힘든 노동’이라고 가르쳤다. 예술가는 자신이 투자한 땀과 노력으로 얻은 영감을 통해 보상받는 것이라고 하며 어려운 기법을 극복하도록 지도했는데, 이것은 일생 동안 그의 지침이 되었다.

   그후 10세 때 레닌그라드 음악원에 신설된 영재들을 위한 특수반에 들어가 음악원을 졸업할 때까지 10년 이상을 부친의 스승이기도 했던 알렉산더 스트라이머를 사사했다. 그는 소련의 첼로 악파를 일으킨 사람 중의 한 사람으로 법, 문학, 예술 등에 박식한 사람이었으며 학생들에게 자신의 지식을 주입시키기 보다는 스스로 해결하게 하는 개방적 교육을 실행하여 샤프란의 음악 세계를 구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샤프란의 첫 연주는 1933년 레닌그라드 그랜드 홀에서 행해졌으며, 1937년에는 ‘전 소련 바이올린과 첼로 경연’에서 우승해 안토니오 아마티를 부상으로 받았는데 지금까지 그 악기를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1943년에는 모스크바 필하모닉에 솔리스트 자격으로 입단했다. 그러나 그를 국제적으로 알린 것은 1949년 부다페스트에서 열린 국제 청소년 콩쿠르와 1950년 프라하에서 열린 ‘프라하의 봄’ 국제 콩쿠르에서 로스트로비치와 공동우승하면서부터이다.

   야노스 슈타커는 1924년 7월 5일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원래 러시아 태생으로 헝가리로 이주했는데, 당시 국적도 얻지 못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아들의 음악적 재능을 일찍이 감지하고 7세부터 첼로를 가르쳤다. 그는 부다페스트에 있는 리스트 음악원에 입학해 다비드 포퍼의 제자였던 아돌프 쉬퍼 문하에 들어가 15세에 졸업했다.

   11세의 어린 나이에 연주대에 오른 슈타커는 1939년 음악원을 졸업할 즈음에는 부다페스트에서 이미 상당한 명성을 얻고 있었다. 그해 슈타커는 코다이 앞에서 그의 소나타를 연주해 작곡가로부터 최대의 찬사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곧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연주는 물론 거의 2년 동안 첼로를 만져 보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야 다시 활동을 시작했는데, 1945년에는 부다페스트 오페라와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첼로 수석을 겸임하게 되었고, 비로소 헝가리 국적을 획득했다.

   세 사람 중 제일 나중에 태어난 로스트로포비치는 1927년 3월 27일생으로 카스피해와 접해 있는 바쿠가 고향이다. 부친 레오폴드는 카잘스의 제자로 1932년에 모스크바로 옮겨 소련 방송 교향악단 단원이 되었고, 또 모스크바에 있는 그네신 음악 학교에서 첼로를 가르쳤다. 어머니 또한 잘 알려진 피아니스트였다. 이런 음악적 환경에서 자란 로스트로포비치는 아주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음악교육을 받아 이미 네 살에 소품을 쓰고 이를 연주했다. 1943년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해 첼로 기교에 있어 권위자였던 코졸루포프에게 첼로를, 세발린에게는 작곡을, 그리고 쇼스타코비치에게서는 관현악법을 배우고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했다.

   10세 때 부친이 소속했던 오케스트라와 생상의 첼로 협주곡을 협연한 바 있고, 1940년대에는 부다페스트·프라하·모스크바 등지에서 열린 모든 콩쿠르를 석권해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직후 부친이 사망하자 불과 15세 소년으로 부친의 첼로 교실을 이어받았고, 또한 독주자로 혹은 리히테르 같은 대가들과의 실내악 연주로 명성을 얻었고, 1951년에는 스탈린상을 받았다.

   이와 같이 세 사람 모두 당대 최고의 스승 밑에서 공부했고 어린 나이에 세인의 관심 속에서 연주를 시작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특히 샤프란과 로스트로포비치는 유사한 가정 환경에서 자랐고, 콩쿠르에서 공동 우승을 하는 등 거의 동일한 성장 과정을 거치지만, 샤프란은 러시아 5인조의 거점이었던 레닌그라드에서, 로스트로포비치는 차이코프스키·안톤 루빈슈타인에 의해 건립된 모스크바에서 교육받았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정치와 이데올로기로 굴곡진 세 거장의 음악과 삶

   한편 성숙된 예술가로서의 이들의 행보는 변화무쌍했던 20세기만큼이나 상이한 모습을 보인다. 슈타커의 경우 정치·경제적으로 불안했던 헝가리에서 제한된 범위의 활동에만 만족할 수 없었던 차에 1946년 빈에서의 연주가 대성공을 거두자 유럽을 순회했다. 그리고 1948년 파리에서 취입한 코다이의 무반주 소나타가 디스크 대상을 받은 것을 계기로 미국으로 이민했다. 그후 댈러스 심포니·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시카고 심포니 등에서 첼로 수석을 지내다 1958년부터는 오케스트라를 그만두고 독주자로서만 활동하기 시작했다. 또한 수크·키칭과 함께 트리오를 구성했고, 인디애나 대학의 교수로 취임했다. 그리고 1962년에는 시카고 대학에서 명예 박사학위를 수여받았다.

   샤프란은 1943년부터 모스크바 필하모닉의 솔리스트이자 독주자로서 국내 연주는 물론이고 유럽·미국·남미·호주·일본 등지에서 연주회를 가졌다. 연주에만 전념한 그는 이를 준비하고 자신을 수련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모자란다고 생각해 교수직은 사양했다. 초기에는 외적·내적으로 많은 고통을 겪기도 했는데, 그의 아버지와 스승 다음으로 그에게 큰 힘이 되어준 사람은 그의 첫번째 부인이었던 피아니스트 니나 부사니안이었다. 샤프란은 여러 국제 콩쿠르에서 심사위원으로 활약하고 있으며, 특히 제5회와 6회 모스크바에서 열린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심사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1955년에는 소련 인민 예술가에 선정되었다.

   1956년에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로 임명된 로스트로포비치는 1950년 이후 소련과 서방간의 문화적 관계가 개선되자, 같은 해 3월 런던 페스티벌 홀에서, 그리고 해 4월에는 뉴욕 카네기 홀에서 공연하는 등 세계를 향한 그의 연주 시대를 개막했다. 1964년에는 레닌상을, 1966년에는 인민 예술가로 호칭되었다.

   그러나 1970년에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솔제니친을 옹호하는 공개 편지를 신문에 실어 정치적인 압박을 받았으며, 1974년에 반체제 작가에게 은신처를 제공해 주었다는 이유로 소련에서 추방되고 1978년에 국적까지 박탈당했다. 1970년에는 런던 로열 필하모닉 협회상을, 그리고 1975년에는 캠브리지 대학의 명예 박사를 수여받았다.

1977년에는 워싱턴 내셔널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가 되어 15년간을 이끌어 왔다.

   그는 베를린 장벽 철거 현장에 제일 먼저 달려갔고 소련의 공산 정권이 붕괴되자 조국을 떠난 지 16년 만인 1990년에 위싱턴 내셔널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귀향해 연주회를 가졌다. 무국적자로 지내던 그에게 새로운 러시아 정부가 시민권 회복을 제의하자 “나는 시민권 회복을 요구한 적도 없고 용서를 빌며 돌아온 탕아도 아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슈타커-관념주의의 절대미,
   로스트로포비치-유토피아적 예술미,
   샤프란-구상주의적 지고의 미
  

정치와 이데올로기로 굴곡진 20세기를 살면서 슈타커는 자의로 고국을 떠나 새로운 삶을 개척했고, 샤프란은 환경에 순응해 그 속에서 예술가의 자존을 지켰으며, 로스트로포비치는 국적을 박탈당하면서 타의로 세계인이 되었다. 이렇게 삶의 방식이 갈라지듯이 그들의 음악 또한 제각기 다른 양식을 심어놓았다

   로스트로포비치는 1965년에 런던 교향악단과 9차례 연주회를 개최, 31곡의 첼로 협주곡을 연속적으로 연주했다. 이는 첼로를 위해 씌어진 협주곡의 거의 모든 레퍼토리에 해당하며 매회마다 앙코르 곡으로 바흐의 무반주 모음곡 중 일부를 연주했다. 이는 초인적인 그의 음악 세계를 상징적으로 잘 드러내 주는 사건이었다. 로스트로포비치의 음악은 음정의 정확성, 모든 음역에서의 충만한 소리, 다양한 음색으로 작곡가의 의도를 본능적으로 느끼게 만든다. 그리고 힘 안 들이고 하는 그만이 가진 고도의 테크닉은 청중을 홀리게 만든다. 그는 각이 진
엔드핀을 사용하여 악기의 위치를 높였는데, 바로 이것이 그의 음량과 테크닉을 가능케 했던 것 같다.

   로스트로포비치는 현대 음악에도 열성적인 관심을 보이고 있는데 그의 연주에 영감을 얻어 하차투리안·카발레프스키·졸리베· 미아스코프스키·프로코피예프·쇼스타코비치·브리튼·슈니트케 등과 같은 많은 작곡가들이 작품을 써 그에게 헌정했다. 한편 그는 만능 음악인으로 지휘자의 권위를 확고히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피아니스트로도 성악가인 부인의 리사이틀을 암보로 반주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그를 유일하게 카잘스와 비교할 수 있는 첼리스트로 볼  수 있다.

   그는 교수직을 갖고 있지 않는 대신에 파리에서 로스트로포비치 콩쿠르를 개최하고 있고, 또 프랑스 에비앙 음악제 위원장직을 수행하며 후학을 발굴·지원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조영창, 장한나 등이 그의 후원을 받고 있다.

   샤프란은 자신에게 예술적 영향을 준 사람들에 대한 질문에 러시아의 전설적인 무용가 갈리나 울라노바, 바흐 무반주 모음곡을 연주한 카잘스와 성악가 피셔-디스카우를 들고 있다. 특히 울라노바는 그에게 ‘레가토’의 의미를 일깨워주었다고 했는데 그의 깊은 음악성과 예민한 서정성, 그리고 우아하면서도 화려한 기법 등이 어디에서 기인하는가를 알게 한다.

   샤프란은 이를 실현하기 위해 독특한 운지법을 개발했다. 그는 음악적 프레이징에 따라서는 어떠한 운지법도 허용된다고 하면서 일상적으로 인지로 하는 익스텐션(화대법)을 모든 손가락에 적용한다든가 옥타브를 피아노처럼 엄지-약지, 인지-소지를 번갈아 사용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그는 연주를 거의 의식과 같은 자세로 임한다. 연주할 때는 늘 축제같이 특별한 기분으로 맞이하고 싶기 때문에 평소에도 저녁에는 일체 연습하지 않고 아침 8시에 시작해 5~6시간씩 매일 하고 있으며, 또한 리허설도 일반에게 절대 공개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는 특히 소품 연주를 통해 청중과의 긴밀한 대화를 즐긴다. 또한 다른 악기들을 위해 씌어진 곡들을 편곡하거나 개작해 연주함으로써 첼로 레퍼토리를 늘리려고 노력했다. 샤프란 역시 학교에 몸담고 있지 않지만 젊은 학도들에게 필요한 충고를 아끼지 않으며 그의 독특한 기법을 세미나나 공개 레슨을 통해 전수하고 있다.

   슈타커가 1972년 뉴욕 필하모닉과 하이든 협주곡을 연주했을 때 쇤베르크는 다음과 같이 평했다.

   “그는 귀족적인 엄격함을 가지고 연주했고, 고도의 논리로 음악적 소재를 구도화했다. 그의 완벽한 아티큘레이션은 달인의 경지에 올랐으며 첼로 소리는 크고 아름답게 울렸다. 그의 하이든 협주곡은 분명함과 균형잡힘에 있어서 극치였다.”

   이처럼 슈타커는 어떤 음악을 연주할 때에도 감정에 휩쓸리는 법이 없다. 항상 냉정하게 작품의 양식을 정확히 파악해 고도의 테크닉과 함께 그것을 축으로 감정을 담아낸다. 따라서 그의 연주 매력은 불과 얼음이 환상적으로 매치되어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 자신의 설명에 의하면 과장된 제스처나 쇼맨십에 반대하며, 또 하나는 헐리우드 영화 속에 멜랑콜릭한 장면에 단골 악기로 등장하는 첼로의 역할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했다. 그리하여 그는 지나친 비브라토나 불필요한 포르타멘토를 피한다.

   슈타커의 또 하나의 업적으로는 첼로 교육에 있다고 하겠다. 그는 가르치는 것을 무척 즐기는데, 스스로가 성격상 연주가보다는 교육자에 더 잘 어울린다고 했다. 그는 특히 다음 세대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스승의 역할에 대해 큰 의미를 두고 있다. 현재에도 이미 파리 고등 음악원의 마크 코페, 독일 프라이부르크 음대의 헨켈처럼 인디애너 대학에서 배출한 제자들이 세계 곳곳에서 연주자·교육자로 활약하면서 슈타커 사단의 계보를 이루고 있다. 비브라토를 비롯해 많은 테크닉들을 바이올린 주법에서 착안해 냈다고 하는데, 그의 테크닉 교칙본과 또 그가 편집한 바흐의 무반주 모음곡은 첼로를 배우는 학도들에게 중요한 지침서가 되고 있다.

   이상과 같은 현역 명 첼리스트 3인의 음악 세계를 정리해 보면, 슈타커는 서구 현대 문명의 특징인 냉철한 이성주의와 관념주의적 접근에 의한 절대미를 추구한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샤프란은 동구의 발레처럼 공산주의 예술에서 볼 수 있는 구상주의와 사실주의가 만들어 낸 지고의 미를 완성하려 했다. 그리고 로스트로포비치는 낭만주의적 상상력을 발휘해 실현될 수 있는 내적 양심의 자유를 분출하여 코스모폴리탄 성격이 강한 유토피아적 미를 추종했다.

   이들 중 로스트로포비치와 슈타커는 이미 몇 차례의 내한 공연을 통해 국내 음악 애호가들에도 친숙한 편이다. 반면 샤프란은 음반도 대체로 러시아에서 출반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음악 팬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편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는 5월 19일 예술의전당과 21일 대구 경북대 강당에서 열리는 샤프란의 첫 내한 공연은 많은 기대를 갖게 한다. 그는 이번 내한 공연에서 자신이 편곡한 브람스의 ‘4개의 노래’ Op.46(1. 환희, 2. 헝가리인, 3. 망각의 물을 부르는 술잔, 4. 밤꾀꼬리에게), 브람스의 첼로 소나타 D단조, 브리튼의 첼로 소나타 C장조, 슈니트케의 ‘알텐스틸 모음곡’(사프란 편곡)을 연주한다.*


김경순/강원대 교수·음악 이론

* 이 글은 1996년에 쓰여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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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gyusub